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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미야베 미유키 - 모방범

2009. 2. 9. 17:29 | Posted by 헤브니



예전에 알던 일본인 언니 한명이 나에게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책을 좋아한다고 소개해 준 적이 있다. 그 후로 쭉 잊고 있었는데 노다메 칸다빌레 방영 때 주인공들이 Smap x Smap에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노다메 원작을 읽었느냐고 질문하던 나카이 씨가 자신이 <모방범>을 반 쯤 쯤 읽었을 때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다시 생각나게 되었다. 그랬는데도 읽을 기회가 없어서 또 그냥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연말 직전에 들른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주저없이 빌려왔다. 정신없어서 읽다말다 하느라 모두 다 읽는데 무려 6주일이 걸려버렸지만, 난 권당 500쪽이 넘는 이 <모방범> 세 권을 결국은 다 읽었다. 모든 일에 시큰둥하게 반응하고 의기소침한 기분 만땅인 요즘의 나로서는 애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

보기에도 찜찜한 표지에서 눈치챌 수 있듯, 이 책은 일가족 살인사건으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은 한 고등학생이 개와 산책을 하던 중 공원에서 우연히 잘라진 팔이 든 가방을 발견하는데에서 시작한다. 검사 결과 가방의 주인과 팔의 주인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고, 가방의 주인인 실종 여성의 가족들은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범인들은 대담하게도 생방송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관련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악랄한 장난을 치면서 세상을 비웃는데...

범인인 구리하시 히로미와 그의 단짝 '피스'는 진실을 눈치챈 그들의 밥 다카이 가즈아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계획을 짜다가, 우발적인 사고로 구리하시 자신이 다카이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어버린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다카이 가족은 모든 것을 잃고 가즈아키의 동생 유미코는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르포를 쓰던 작가에게 오빠의 결백을 증명해 달라는 도움을 청하러 가던 길에 우연히 오빠의 친구라고 자신을 밝힌 아미가와를 만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수사 결과는 다카이가 공범이 아니라는 쪽에 가깝게 진행되나, 제3의 인물을 찾기 위한 수사는 특별한 진전이 없고, 그러던 중 아미가와는 다카이가 진범이 아니라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며 매스컴을 타고 일약 유명인사가 된다. 

1500쪽 짜리 책 내용을 줄거리 몇줄로 소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용 정리는 애저녁에 포기를 해야겠다. 갈 수록 재미는 있었지만 참 읽기 힘들었다.

첫째로, 읽을 수록 찜찜한 기분이 들게하는 소설이었다. 아무런 죄의식도 가지지 않고 사람을 괴롭히다가 죽여버리는데,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죽인다. 누가봐도 호감이 생길 만큼 서글서글하게 멀쩡하게 생긴 젊은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피해 여성들을 꼬여내고, 이용하고, 죽여버린다. 죽이고도 조용히 그냥 파 묻는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시신이 발견되게 만들기도 하고... 아~ 정말 기분 나빠져.

둘째로, 등장인물이 정말 많다. 최초 발견자인 쓰카다 신이치, 수사를 맡은 경찰의 특별반, 피해자의 가족들, 다카이 가족들, 르포 작가 등... 이 많은 사람들의 관계가 얽히고 얽혀져 등장에 재등장을 반복하는데... 중간에 놓았다가 다시 읽으려니 이름이 헷갈려서, 으아...

셋째로, 소설 자체가 정말로, 진짜로 길었다.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 범인들의 성장과정, 그리고 3권에 이르러서는 진범이 밝혀지게 되는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길어, 길어. -_-;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버린 이유는, 물론 한번 시작한 책을 어지간해서는 놓아버리지 않는 내 성격 탓도 있지만, 한창 읽던 도중에 요즘 한국을 시끄럽게 만드는 연쇄살인범 강 모 씨 사건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소설 속의 이야기가 더 이상 허구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엊그제 읽은 기사에서는 강 모씨에게 피해자 가족들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벌일 거라는 내용도 보도되었는데, <모방범>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더라.

강 모 씨에 대한 이야기는 뉴스에서 보도되는 단편적인 이야기들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니, 이 <모방범>에서 묘사된 것처럼 자세한 주인공들의 성장과정과 심리까지는 이해할 수 없어도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이유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죽이고도 자신은 태연자약하게 다음 날을 살아가는 괴물을 만드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무서운 건, 우리들은 옆 집이나 윗 집에 사는 인상 좋은 어떤 남자가 반갑게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실제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거? 아.. 무서워. ㅠ.ㅠ

일본 추리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일본 소설의 범죄 유형은 한국 소설에서 접할 수 있는 범죄 유형보다 훨씬 잔인하고 악랄하다. 번역한 양억관 씨의 후기에서도 접할 수 있듯 더욱 잔인하고 악랄한 범죄 유형의 유무가 선진국의 척도를 가늠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개인의 삶이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한 사람의 가치관의 거의 모든 부분이 성장하는 시기를 보내는 가정의 역할이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고, 그럴 수록 삐뚤어진 가정에서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삐뚤은 삶을 살게 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까? 가정조차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개인은 과연 어디에서 소속감과 안락함을 찾을 수 있는 걸까. 어쩌면 범죄를 저지르는 많은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외로움을 해결하지 못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끝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등장인물, 살해당한 피해자 중 한 사람인 후루카와 마리코의 외할아버지인 아리마 요시오 씨를 소개할까 한다. 두부가게를 하며 평생을 견실히 살아온 이 할아버지는 딸의 별거, 손녀의 실종, 나중에는 살해되어 사망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정신공황 상태로 교통사고를 당한 딸이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사건을 한꺼번에 겪게 된다. 이 할아버지와 나중에 만남을 갖게 된 르포 작가 마에하타 시게코가 이런 생각을 한다.

"사건이 이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것이다.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노인의 발치에는 그가 성실하게 일하며 지켜온 인생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이 사람은 그 파편을 밟고, 그것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3권 본문 96 페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최초발견자이자 그 자신도 일가족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쓰카다 신이치의 상처를 품으며 진범을 찾아내고 싶은 일념을 밝히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대로 잠자코 앉아서, 또 무언가가 다가와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빼앗아가는 것을 묵묵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 지금은 결과가 중요하지 않아.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기 힘든 건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이제는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싫어 (3권 본문 277 페이지)."
 
내가 맞딱뜨려야 할 가까운 미래의 일들을 선택할 수 없다면,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나의 태도만이 결국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권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싫다'고 일갈한 할아버지의 말이 진정한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찝찝한 기분이 들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문을 던져주는 괜찮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