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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 인생은 한방이라잖아.

2008. 5. 22. 01:57 | Posted by 헤브니
오늘 아침도 음악을 들으며 출근을 했다.
어제 저녁에 분명히 CD를 몇장 집어다가 가방 옆에 둔 것 같은데,
당연하다는 듯 가방만 들고 아침에 집을 뛰쳐나왔나보다.
피아노 듣고 싶었는데... 하며 뒤져보니 차 안에 라벨의 피아노 전곡 모음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특별판을 보고 샀던 앨범인데,
원래 만화에서 노다메가 연주했던 곡은 "Jeux D'Eau(물의 유희)"였지만
드라마로 각색될 때는 "Alborada Del Gracioso: Assez Vif (어릿광대의 아침노래)"로 바뀌었다.

둘 다 들어있는 앨범을 사려면 역시나 라벨의 피아노 전집밖에 없는데
마침 서점에 피아니스트 Jean-Philippe Collard 의 앨범밖에 없었다.
라벨 전집은 페를뤼무터나 타로 앨범을 사라고들 많이 추천했는데
둘 다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 싶어 그냥 골라왔다.

음악을 좋아하니까 열심히 들어보고는 있지만, 난 사실 음악을 즐기는 법은 잘 모른다.
음악사 수업 열심히 들어봤지만, 즐길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 혼자 공부하는 방법은
일단 듣고 싶은 곡이나 꼭 라이브로 들어보고 싶은 연주자들의 콘서트를 예매한 다음에
음반을 구해서 들어보는 것이다.
CD속지를 열심히 읽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더 궁금한게 있으면 인터넷을 뒤진다.

그렇게 열심히 들어보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작곡가나 곡에 대한 호불호는 꽤 분명하게 갈리는 편이라
낭만주의 후기로 가면 갈수록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
너무 무 자르듯 딱 잘라버린 단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맞는다고 보면 된다.

이번 주말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가기로 한 콘서트는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지휘하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그 콘서트 프로그램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매했지만
지난 번에 안네 소피 무터의 연주로 듣고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브람스의 곡인데다
게다가 이번엔 독일 레퀴엠이라고 하니...
여행 중이니 피곤할 것임에 틀림없고, 어쩌면 졸지도 모른다고 미리 걱정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작곡가나 잘 모르는 곡까지도
열심히 들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독주곡이 아닌 이상 최소 30여분 이상 길게는 한시간도 넘는 그런 곡들을
열심히 듣는 일은 집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힘들기 짝이 없어도
가끔 어떤 한 소절이 크게 마음에 와닿아 기억에 큰 잔향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 소절을 다시 느끼기 위해,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 전곡을 다시 다 들어버리는 것이다.

라벨의 음반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지만 유려하게 흘러가는 멜로디를 들어도
사실 귀에 남는 "소절"이라는 게 많지 않은게 인상주의 작곡가 음악의 특징이다.
이전의 소나타 형식처럼 반복이 많지 않으니까.

한번 지나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버린다.
사실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인상"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재생되지 않는 어떤 것.
순간에 느껴버렸던 어떤 모습에 대한 표현.
찰나적이기 때문에 느끼는 어떤 매력이라고 해야하나.

"어릿광대의 아침노래"의 도입부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강렬하게 꽂히는 어떤 것을 찾기 위해
그냥 열심히 들어보는 거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가리아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왔고,
이 친구는 나와는 달리 이민 수속 문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고
워낙에 뛰어났던 아이라 졸업하자마자 바로 버클리에 입학하여 조기 졸업하고
비영리 단체에서 여러가지 일을 해보다가
다시 버클리 대학원에 들어가 public policy (공공정책이라고 하나..)를 공부하고 있다.

이번 주말의 여행 계획을 알린게 언젠데 이제서야 전화가 오다니! 하고 받았는데
내일 브뤼셀로 가기 때문에 못 만난단다. EU에서 인턴쉽하러.
10주간 브뤼셀에서 지내고, 불가리아로 가서 쉬다가 8월에나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저 부러울 따름.
영주권이 있으니 불편 한 것 없겠다 싶어 부럽고, 유럽에 간다는 사실도 부럽고,
거기다가 EU에서 인턴쉽한다는 말만 들어도 멋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니 부럽고,
하고 싶은 그 일이 또 멋있어 보이니 부럽고.

그냥 그런 생각이지만 순간이나마 나름 상대적 열등감마저도 느껴졌다.

잘 다녀오라고 이야기 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음반 한 장을 다 듣고도 남는 게 "한 소절"인 것처럼,
열심히 인생을 살아도 남는 건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한 방"이다.

그 "한 방"이 모두가 원하고 세상이 이야기하는 돈, 명예, 존경같은 사회적 성공일 수 있고
꼭 그런 것들은 아닐 수도 있고, 그거야 가치관에 따라 다를테지만
무릎팍에서 황정민 씨가 말했던 것처럼 "인생은 한 방이에요" 뭐, 그런 것.
오랜 무명시절을 거쳐 실력으로 인정받아 지금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배우가 된 것처럼.

그 "한 방"이 있으면 그 동안의 지루함, 짜증, 지침 따위는 모두 사라지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얻게 될 수 있는 거다.

내 인생의 그 "한 방"을 위해서
지금 내가 앉아있는, 전혀 폼나지 않는 이 자리에서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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