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도 영화에 대해 글을 올리려니,
어쩐지 굉장한 뒷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90년대 중반에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본 후로
내가 생각하기에 이만한 여성 로드 무비(!)는 다시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다섯 번쯤 본 것 같은데, 보고 또 봐도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다.
남자 친구에게 화가 나 있어, 직장 동료의 산장으로 가 머리를 식히고 오고 싶었던 루이스는
위압적이고 교만하고 성격 더러운 남편과 사는 친구 델마를 데리고 가서
이틀 정도 쉬고 오려는 소박한 계획을 세운다.
신경질적인 남편에게 차마 그 계획을 말하지 못했던 델마는
말도 못 꺼낸 주제에 남편 허락도 없이 화려한 외출을 감행한다.
이 짧은 휴가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도 모르고 신나하는 그녀들.
가는 길에 쉬려고 들른 바에서,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의 감시에서 벗어난 기쁨에 어쩔 줄 모르는 델마는
플레이보이 기질이 다분한 낯선 남자와 춤을 추다가 술에 취해버리고
긴장을 놓지 않은 루이스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몸은 가누지 못해 밖으로 나갔다가 봉변을 당할 위기에 놓인다.
때마침 친구를 찾은 루이스가 봉변에서 델마를 구해내지만
그 뒤에다 대고 욕을 하던 남자의 폭언을 참다못해 홧김에 빵! 하고 총을 쏘아버린다.
뒤에 밝혀지지만 루이스가 거의 강간미수범에 가까운 그 녀석의 폭언을
참아내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후의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눈덩이처럼 커져버리고…
우발적인 범죄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싶은 불행과 불운은
그녀들을 더욱 독하게 만든다.
불행에 빠져서야 인간은 자신의 본보습을 깨닫게 된다고,
그러나 그녀들은 평생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자신들의 감정의 표출에 시원해하고
여자 알기를 뭐 같이 알고
힘으로 남성의 우월함을 내보이고자 하는 무식한 마초들에게 대항한다.
근데 아이러니인 것은,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그녀들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남자 친구와 사이가 좋았다면 루이스는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된 휴가를 계획하지 않았을 것이고.
남편과 사이가 좋아 모든 일을 의논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면
델마가 남편의 뜻을 어기고 나와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휴가의 기분을 맛보고 싶어 술에 약간 취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고,
그 실수가 살인이라는 우발적인 사고로 이어졌던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고,
멕시코로 가는 길에 만난 건달에게 도피자금인 전 재산을 털리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델마가 자발적으로 무장 강도로 변신하여 마켓을 터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변태 성욕자가 혀를 내밀고 불쾌한 언사를 내뱉지 않았다면
이들이 그가 몰던 화물 기름차를 총으로 쏴버려 폭발시키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 살인이 발생하자 경찰에게 가자던 델마에게 루이스는 이야기했다.
“사실대로 말하자고? 네가 거의 강간을 당할 뻔 했기 때문에 대항하다가 죽여버렸다고 말하면 누가 믿을 것 같니? 바 안에는 너랑 그 남자가 뺨을 맞대고 춤추던 걸 본 사람이 100명도 넘는데.”
그런데 그녀들의 한번의 방종함이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이 될 만큼 큰 잘못이었을까.
그녀들은 그저 휴가를 즐기고 싶었을 뿐인데.
도피 중간에 경찰에게 잡혔다가 경찰을 제압하고 다시 도망가는 장면에서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으니 살려주세요'라고 울먹이는 경찰에게 델마가 이렇게 말한다.
"행운이네요. 그들에게 잘해줘요. 특히 아내한테. 내 남편은 나한테 안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 결과로 내가 어떻게 되어버렸는지 봐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여, 들으라. -_-;
이 영화는 인생에서
한번의 잘못된 선택이 상상도 못한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인간에게 남은 것은 그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결과에 대한 책임 뿐이라는 것?
그것도 아니면 그저 단순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과격하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_-;
델마와 루이스는 물론 이 모든 엄청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졌다.
남들처럼 일반적인 행복을 느끼며 살아오지 않았던 두 사람인만큼
남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할 경찰에 자수하는 것과 감옥에서 죄값을 치르는 방식이 아니었을 뿐.
두 사람은 그들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도, 미련도 남아있지 않는 삶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어가기로 한다.
지치고 반복되는 일상을 그대로 내던져버리고
아무 걱정없이, 미련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신날까.
그리고 얼마나 살만한 인생이 될까.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델마와 루이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릴 수 없다.
우리에겐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책임져야할 자식들, 키워주신 부모님이 있고
시도해보지 못한 일들이 있으며, 꿈과 계획이 있고,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어느 쪽이 더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없이 위의 모든 것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평생을 옥 죌 것이 분명한 책임감이 따라오겠지만
아무 것도 없이 살아가야 할 이 인생은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
지겨운 일상에 넌더리가 나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은 꼭 봐야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일탈? 별 것 아니다.
순간의 실수가 평생을 좌우하는 법이라고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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