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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영화와 같은 만남을 꿈꾼다

2008. 8. 17. 16:54 | Posted by 헤브니
고2였던 11학년 때였다. 참 멋지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있었다.

나, 공부 잘하는 남자에게 약하다. 그 녀석, 공부를 참 잘했다. 나, 키 큰 남자를 좋아한다. 그 녀석, 키가 183이었다. 나, 밖에서는 적당히 과묵하지만 나한텐 말 많이 하는 사람이 좋다. 그 녀석, 심심할 때 전화하면 3시간도 통화해줬다. 나, 음악 잘하는 남자 무지 좋아한다. 그 녀석, 쇼팽의 즉흥환상곡도 칠 줄 아는 녀석이었다. 으~ 무서운 놈.

같은 나이이지만 이민 왔을 때 어찌하다보니 다른 학년으로 들어오게 되어 녀석은 나보다 1년 먼저 졸업을 했다. 졸업식을 치르고 먼저 졸업하면 못보게 될 게 아쉬워, 다른 친구가 같이 졸업한다는 걸 핑계로 졸업식에도 참석해서 인사를 나눴다.

졸업하고 얼마 후에 그 때 10대들이 열광하며 보았던 섹스 코미디 <아메리칸 파이2>를 같이보고 영화관 근처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그리고 못 만났다. 2001년이었으니 7년이 지난 이야기다.

고등학교 3학년을 지내던 나는 이민 온 후 정리 안된 여러 상황이 너무 힘들었었다. 타도시의 대학에 진학한 그 녀석, 가끔 MSN 메신저에서 이야기 들어주기도 하더만 어느 순간 점점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자신은 할 일이 너무 많아 정말 바쁘다, 친구로서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느 날은 방학이라 집에 돌아올테니,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의 졸업식도 볼겸 온다고 했다. 졸업식 며칠 전에 전화가 왔는데, 내가 외출 중이라 아빠가 받으셨다. 남겨놓은 메세지가 갑작스럽게 치과에 다녀와 얼굴이 너무 부어 못볼 꼴이 되어 도저히 참석할 수 없어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연락이 없었다.

신경질이 났다. 그 녀석은 내 친구가 하기 싫은 거다, 라는 결론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대화 5분이 힘들다면, 그건 인간관계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나에게 최소한의 노력도 보여줄 수 없는 친구라면 나도 필요없다고 생각해서 나도 마지막 메세지를 씹었다. 그게 마지막이다. 2002년 6월이었으니, 6년이 지난 이야기다.

그 이후로 그만큼 착했고, 똑똑했고,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남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관심이 가는 남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난 그 애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는가보다. 6년이 넘도록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살았지만, 나도 남자 친구 한번 쯤 사귀어봐야하는 나이가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김없이 그 애가 꿈에 나타난다.

꿈 속에서 나는 그 녀석을 모른 척하고, 그 녀석은 모른척하는 나를 붙잡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될 때까지 참은 거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드라마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그 녀석은 내 꿈 속에서 드라마에 나올 법한 아주 근사하고, 보통 여자라면 그 자리에서 그냥 넘어갈 법한 대사를 하더라. 그리고 어떻게 되는지는 곧바로 꿈에서 깨어버리기 때문에 기억을 못하지만, 해피엔딩이겠지?

오늘, 6년만에 처음으로 그 애 소식을 들었다. 우연히 들른 팬시점에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그 아이 사촌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사촌 이름도 기억하는데, 사촌 아이는 내 얼굴을 알아봐도 이름은 못 기억하더라만, 덕분에 그 녀석이 예상했던 대로 의대에 진학해 아직도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워낙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라 사촌도 1년에 네 번 정도 밖에 얼굴을 못 본다고 한다.

"요즘 우리 나이가 그런가 봐. 걔는 결혼했니?" 라는 내 질문에, "언니, 결혼은 무슨~ 아직 어리잖아요!"라고 말하던 사촌 동생을 통해 최소한 그 애가 결혼은 안했다는 건 알아냈다.

...전화번호 물어보고 싶은 걸 간신히 눌러참았다.

만약 인연이라면,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도 아니고 인연이 아니라면, 그 녀석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걸 믿어서라기보단 난 그저 꿈 속에서와 같은 영화같은 만남을 꿈꾸고 있는가보다.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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