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어떤 남자.

헤브니 2005. 12. 21. 17:35
완전히 잊고 살 때 쯤이 되면 꿈속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고2때 좋아했었던 친구.

내가 좋아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거의 다 갖추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많을 때 침묵을 지킬 줄 알고,
언제나 열심히 할 일을 다 해왔고,
공부도 잘 했으며, 결정적으로(?) 키도 컸다.

나는 일단 공부를 잘 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학생의 신분으로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에 충실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

내가 본 남자들 중, 아마도 가장 공부를 잘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잘난척 하거나 아는척 하지 않는 모습이 더 예뻤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어느 날, 깨달아버렸다.

이 아이가 학교의 다른 여자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순간,
정말 싫다고 생각해버렸던 것.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해버렸다.

길지 않은 내 인생 22년 동안,
남자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을 내가 먼저해버렸던 건 아직까지는 이 아이가 유일하다.

나름대로의 "고백"이랄까 "감정 터트리기"랄까.
장황하게 늘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나는 거절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 동안 보아왔던 그 아이의 모습은 공부에만 미쳐있었기에,
나랑 동갑이었음에도 미국에 올 때 한 학년 낮춰서 고등학교에 들어간 나와는 달리 동갑의 미국 아이들과 같은 학년이었던 나보다 한 학년 위로 들어가
대학 입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있었던 그 아이에게 여자친구같은 문제는 고민꺼리도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귀건 안 사귀건 어쨌거나 친구로 붙여두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그 아이가 나보다 1년 먼저 졸업하고 샌디에고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1년 정도는 연락을 계속 해왔다.

그러다가 내 쪽에서 정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이메일 쓰는 시간도 아까워할 정도로 공부에만 매달리면서
친구니까 이해해주겠지라고 생각했던 태도였다.
어느 날, 예의 똑같은 내용의(자주 연락 못해 미안하다, 영화 보러 가기로 한 약속 취소해야겠다) 이메일을 읽고 화가나서 답을 하지 않은 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2002년도 여름 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면, 그 쪽의 마음은 배려해주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더군다나 여자 친구로서 관심을 두지 않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아까운 시간을 일부러 할애해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자주 전화 걸어 수다를 떨어댔던 내 행동이,
오늘에 와서야 철이 없는 행동이었다고 느껴질 정도이니까.
시간 참 아까워했었을지도.
근데 수다는 왜 계속 같이 떨어줬을까.

그런데 이 녀석이..

존재를 잊고 살만 하면 꿈에 한 번씩 나타난다.
장소는 내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이 잔뜩 묻어있는 내 고향집 근처이다. 왜 거기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 때 미안했다고 사과하는 모습이었다.
꼭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일 처럼.

도대체 왜 나타나는 거냐. 그것도 꿈속에서만.

너무 생생하게 꾸어진 꿈이라서 결국은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렸다.

무의식 중에 지금 내 주변의 남자들과 그 아이를 비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다.

어차피 내 감정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충실했고,
용감하게 소리내어 고백도 해봤고.
내 감정에 충실했던 기억 때문에 지금 돌이켜봐도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는 그런 추억이 되어버려있는 것이기에.

지금쯤 이미 대학은 졸업을 했겠고, 대학원을 갔는지 어디에 사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아직도 부모님이 이 동네에 살고 계셔서 이 곳에 가끔이라도 들르다가 어디선가 우연히 부딪혀 만난다면,
그러면 커피라도 한잔 같이 마시며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